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아드 바레 (문단 편집) ==== 학정 ==== 유엔 개발 계획(UNDP)가 '시아드 바레의 21년 정권은 아프리카에서 최악의 인권 기록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바레의 학정은 아주 잔혹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바레의 소말리아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언론의 자유도 없어 국영 언론을 제외한 모든 언론이 폐쇄당했으며, 시위와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금지되었고, 편지와 전화 같은 국민들의 '개인 통신'에도 정부가 간섭했으며, 사회주의 정책 하에 종교도 탄압받아 예배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항의한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투옥되고 처형당했다. 심지어 당시 소말리아는 이동의 자유도 '심각하게' 제약을 당했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바레는 [[북한]]과 [[민주 캄푸치아]],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처럼 국내 여행도 [[려행증]]과 비슷하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바레는 주요 도시에 통금 시간을 적용한 후 이를 자의적으로 제한해 군인과 통금 시간 순찰대가 민간인들을 강탈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으며, 국내 여행을 하려는 사람도 군사 검문소에게 방해를 받게 했다. 집권 3개월도 안 된 1970년 1월 8일에 [[소련]]의 [[KGB]]의 도움으로 창설된 국가안보국(NSS)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로 의심되는 사람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국가의 독립, 통일 또는 안전에 반하는 행위'[* 보이다시피 범위가 매우 모호하게 정의되어 있어 법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무고한 사람을 정치범으로 간주해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는 법으로 금지되어 그러한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져야 했다. 동년 9월에 정부는 국가보안법 제54호를 도입하여 국가보안법에 비판적 견해를 표명한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무기한 체포·구금할 수 있는[* 그나마 재판 없이 투옥된 사람들은 대개 몇 주~몇 달만 지나면 풀려났다고 한다.] 권한을 부여했다. 특히 1970년부터 1983년까지 NSS 수장 겸 내무부 장관[* NSS는 소말리아 내무부에 직속된 기관이었다.]을 역임한 아흐메드 술레이만 압달라 '다플'(Ahmed Suleiman Abdalla 'Dafle')은 바레의 사위였으며, 1969년 쿠데타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NSS 요원들은 무제한의 체포 및 구금, 수색, 재산 몰수 권한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렇게 수감된 사람들은 족쇄가 채워진 채 몸을 설 수도 펼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지하의 독방에서 하루를 빵 한 조각과 물로만 버티면서 살아가야 했다. [[동독]]의 [[슈타지]]로부터 훈련받고 고문 기구를 제공받은 소말리아의 [[고문기술자]]들은 체포된 사람들에게 사람을 뒤틀린 자세로 묶고는[*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한 후 손과 발을 등에 묶은 모습이 [[미그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미그'라는 별명이 붙었다.]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것은 기본에 양동이나 물탱크에 머리를 담그거나, 오랫동안 거꾸로 매달거나, 살해 위협을 가하거나, 칼로 찌르거나, 굶기거나, 철제 침대에 눕힌 채 침대에 전류를 가하거나,[* 이런 전기고문 방식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호르헤 비델라]] 같은 남미의 극우 군사독재자들과 [[크메르 루주]]가 좋아했던 방식으로 유명하다.] 남녀 가리지 않고 수감자를 강간하거나, 모의 처형을 가하거나, 여성 수감자들을 나체로 행진시키는 등 다양한 고문을 가했고, 심지어는 손과 발을 묶은 뒤 물탱크에 던지거나 자루에 사람을 넣고는 자루를 묶은 후 바다에 던진 뒤 익사 직전에야 건져내거나 고환을 손으로 비틀기도(!) 했다. 가장 악명 높은 심문 센터는 '고드카(Godka)'라고 불린 모가디슈의 센터였는데, 당시 소말리아의 구금 센터는 '매우 끔찍한' 시설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바레는 이에도 만족하지 못해 '행가시(Hangash)'라고 불리는 국방안보국을 설치했는데, 1978년 쿠데타 미수 사건 후 소말리아 군대와 NSS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가시는 점차 NSS와 중복되는 권한을 얻었고, 역시 법적 권한 없이 운영되어 NSS보다 더 두려운 존재로 인식될 정도였다. 준군사 조직이자 비밀 경찰 부대인 '승리의 개척자들(Guulwadayal)'도 직장, 학교, 모스크, 개인 저택 등 모든 도시와 마을에 존재했으며, 심지어 바레는 이도 모자라 또 다른 군사경찰인 '백브레이커(Dhabar Jabinta)', 바레의 경호원들이자 정예 부대인 '붉은 베레모(Red Berets)', 여당에 소속된 SRSP 수사국 등의 조직을 만들어 국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도록 했다. 이도 모자라 바레는 야당 무장 세력과 관련 민간인에 대응하기 위해 이동군사법원(MMC)까지 만들며 군 관리로 하여금 보여주기식 재판만 거치게 한 후 판결 직후 사형에 처하게 했다. 인류 역사의 독재국가 중에서도 바레 이상으로 촘촘하게 국민들을 감시한 나라는 '''[[북한]]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말리아는 그야말로 숨도 쉴 수 없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 '반혁명적'인 행동과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1969년부터 1980년까지 공개처형된 사람만 무려 61명에 달했다고 하며, 재판 없이 초법적으로 처형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반군을 위해 기금을 모금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한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반정부 활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도 야당 조직원과 [[친척|혈통을 공유했던 사람]]도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https://www.refworld.org/docid/3ae6ad03c.htm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